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아일랜드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다루는 항목.
[clearfix]
1. 개요
현재 감독직은 스티븐 케니이다. 녹색소년들(The Boys in Gree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 유니폼 스폰서는 뉴발란스다.
2. 역사
아일랜드 국대의 팀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여 현대 독립국 아일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역사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1916년에 '부활절 봉기' 라고 해서 아일랜드 독립의 계기가 된 일대 사건이 터졌다. 아일랜드는 수백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영국의 지배와 탄압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에 와서야 아일랜드에서도 목숨을 건 저항이 시작되려던 때였다. 피로 얼룩진 영국-아일랜드 전쟁(1919~1921)과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을 거치며 독립국의 윤곽을 드러낼 때에 아일랜드 축구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880년 벨파스트에서 아일랜드 축구 협회(IFA)가 설립된 이후 아일랜드 섬 전 지역의 축구 행정은 IFA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북아일랜드 6개주는 영국령으로 잔류하고, 남아일랜드 26개 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반쯤 독립[3] 하면서 IFA와 분리된 아일랜드 자유국의 축구협회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같은해 아일랜드 자유국의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가 출범하였다.
이후 아일랜드는 같은 해에 프로 리그 창설과 FAI컵 등을 만들어 축구 발전에 매진했고, 3년 뒤인 1924 파리 올림픽 1라운드에서 불가리아와 역사상 첫 A매치를 치러 1-0으로 이겼다. 미국과의 홈 데뷔전에서도 3-1로 이겨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동안 팀은 국내외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실력 부족도 이유 중 하나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아일랜드 국민들의 무관심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축구보다 민족 고유의 스포츠인 게일릭 풋볼과 럭비를 더 사랑했으며 축구는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거기에 FAI는 아일랜드가 완전히 공화국이 되기[4] 3년 전인 1946년까지만 해도 북아일랜드 출신 선수 역시 국대에 등록 가능했다. 193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 전 지역의 영유권를 주장하였는데 기존의 IFA가 '아일랜드 축구협회'로서 대표권을 주장하며 독립해나간 남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계속하자 FAI 역시 대표권을 주장하며 북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이어나갔는데 민족/종교 갈등이 지속된 상황에서 대표팀의 결속을 깨뜨리는 결과를 빚었다. 여기에 한 지역에 2개의 축구협회와 축구대표팀이 병립하여 서로 동일한 선수를 선발하는 등 자꾸 혼선이 빚어지자 FIFA는 FAI와 IFA의 선수 선발 권한을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경계를 따라 분리하기로 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FAI는 IFA가 FIFA에 재가입한 1946년부터 남아일랜드 출신만 국대에 발탁하기로 하면서 북아일랜드와의 결별을 선언하여 두 팀은 완전히 갈라졌다.[5][6]
이후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60년대에 조니 자일스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나와 활약했지만, 아일랜드는 번번이 월드컵이건 유로 대회건 죄다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1973년부터 7년간 자일스가 감독까지 맡아 활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86년에 잉글랜드 국대 출신이자 '더티 리즈'의 리더였던 잭 찰튼이 감독이 되어 프랭크 스테이플턴, 크리스 휴튼, 로니 웰란, 믹 매카시, 존 올드리지, 나이얼 퀸 등의 우수한 선수들이 출현하면서 또다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닻을 올린 (재키)찰튼호는 유로 1988 출전을 시작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 미국 월드컵에 연속 출전하며 각각 8강과 16강에 진출하며 준수한 성적을 냈다.
아일랜드의 첫 유로 상대는 공교롭게도 잉글랜드였다. 경기 장소는 슈투트가르트의 네카어 슈타디온(현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 이 경기에서 아일랜드는 전반 6분에서 레이 호튼의 골로 1-0으로 이겨 전 유럽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소련에게 비기고 네덜란드에게 패해 조기 탈락하긴 했지만, 잉글랜드 역시 같이 광탈당하면서 외롭지는 않았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조별예선 3경기를 전부 무승부'''로 통과하고, 심지어 '''16강도 무승부'''여서 승부차기로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에서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석패했다. 이론상으로 잘만하면 조별예선 3경기와 16강-8강-4강-결승까지 '''7전 7무로 우승'''할수 있다는 것을 반증할수 있는 사례가 될 '''뻔'''했다. 이로써 이탈리아에서 1988년의 돌풍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아일랜드는 유로 1992에는 못 나갔지만 영건 로이 킨이 가세하면서 또 다시 출전한 1994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첫 승리를 따냈다. 6년전 잉글랜드를 광탈시킨 그 호튼이 이번에는 장거리포 한 방으로 이탈리아의 골문을 초토화시켰다. 아일랜드는 조 2위로 16강에는 갔지만 네덜란드에게 6년만에 또 졌다. 한편 아일랜드에게 진 이탈리아는 결승까지 갔다.
1996년부터 유로 1996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잭 찰튼 감독의 후임으로 감독직에 앉은 믹 매카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네덜란드를 이기고 조국에 월드컵 본선 티켓을 선물했다. 팀의 핵심 미드필더 로이 킨이 사이판에서의 훈련 캠프 도중 FAI의 무성의한 태도와 훈련 장소 섭외를 규탄하며 아일랜드로 조기에 귀국하는 악재가 있었지만, 그래도 3골이나 터뜨린 로비 킨의 활약으로 16강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16강전에서는 스페인에게 승부차기까지 가서 탈락했다.
이후엔 통 재미를 못 보고 있는데, 2009년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프랑스와의 유럽 지역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티에리 앙리의 신의 손 사건으로 억울하게 탈락하기도 하였다. 조금 부연설명을 하자면, 플레이오프경기에서 1,2차전 0-1, 1-0, 합계 1-1로 동률이 되어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앙리의 어시스트를 받은 갈라스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배. 문제는 앙리에게 패스가 들어가는 시점에서 이미 오프사이드였고, 앙리는 자신을 지나가는 공을 손으로 쳐서 컨트롤하고 왼발로 들어오던 갈라스에게 어시스트를 하였다는 거다. 즉 명백한 핸들링 반칙. 재경기 여론이 높았으나 결국 프랑스가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월드컵 본선에서 '''남아공 쇼크'''라는 대사건을 일으키며 제대로 망했고, 아일랜드 언론은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조금이나마 복수를 했다(...).
이후 유로 2012에선 베테랑인 데이미언 더프가 마지막 불꽃을 태워 플레이오프 끝에 에스토니아를 제치고 진출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에게 1-3, 스페인에게 0-4, 이탈리아에게 0-2로 지면서 3전 전패 1득점 9실점으로 조 꼴찌는 물론 대회 꼴찌로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마틴 오닐 감독과 로이 킨 체제로 개편하여 리빌딩에 나름대로 성공한 아일랜드는 유로 2016 예선을 극적으로 통과하고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어 스웨덴에 1-1 무, 벨기에에 0-3 패, 이탈리아에 1-0 승으로 1승 1무 1패로 16강에 진출했으나, 16강전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앙투안 그리즈만에게 2골을 허용함으로써 1-2로 탈락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는 세르비아, 웨일즈, 오스트리아 같은 팀과 한 조에 들어가 비교적 할만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결국 마지막 데스매치에서 웨일즈를 이기고 2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로 올라갔다. 플레이오프에서 덴마크를 만났는데 원정에서 잘 비겨놓고 홈에서 학살당하면서 또다시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로비 킨, 존 오셔, 셰이 기븐, 데이미언 더프로 대표되던 2000년대 초 전성기를 이끈 멤버들의 퇴장 이후로는 확실히 성적이 신통치 않다. 키어런 클락, 셰이머스 콜먼, 제임스 매클린. 셰인 롱, 로비 브래디 등이 현 대표팀의 주축이지만, 무게감은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 자국리그가 탄탄하지 않아 다음 세대 선수 양성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섬 위쪽이 동시에 약진하는 상황이라 씁쓸한 상황.
자국리그가 이웃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비해 형편없이 약한 편이고 심지어 섬 위쪽 북아일랜드 리그보다도 경쟁력을 가진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국내 축구기반이 약하다. 따라서 많은 축구 유망주들이 어릴적부터 잉글랜드 리그 유스팀에 건너가 축구를 배우고 또 프로에 데뷔하는 기형적인 인재 양성 구조를 가지고 있어, 아일랜드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잉글랜드 리그 소속인 경우가 많다. 2020년 유로 2020 예선 플레이오프에 소집된 선수들의 명단만 봐도 대런 랜돌프[웨스트햄] , 엔다 스티븐스[셰필드] , 맷 도허티[토트넘] , 제프 헨드릭[뉴캐슬] , 로비 브래디[번리] , 제임스 맥카시[팰리스] , 코너 하우리헨[빌라] , 셰인 롱[사우스햄튼] 등 프리미어리그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엥? 이 선수가 잉글랜드 국적이 아니었어?'' 할 만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되어있다. 이번 명단에 빠진 선수들 중에서도 셰이머스 콜먼[에버튼] , 키어런 클락[뉴캐슬] , 데이비드 맥골드릭[셰필드] 등 EPL 소속 아일랜드 선수들이 정말 많다. 하부리그인 EFL 챔피언십으로만 내려가도 아일랜드 선수들의 숫자는 훨씬 많이 늘어난다.
아일랜드의 23세 혹은 21세 이하 대표팀에는 토트넘의 트로이 패럿, 셀틱의 리 오코너, 스토크 시티의 나단 콜린스, 본머스의 마크 트레버스, 아스톤 빌라의 잭 클라크, 리버풀의 퀴빈 켈러허, 사우스햄튼의 마이클 오바페미, 브라이튼의 아론 코널리 등 각 팀의 준주전급 유망주들이 많기 때문에 향후 아일랜드의 축구 성적을 기대해 볼 만 하다.
아일랜드의 가장 큰 불안요소는 데클란 라이스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자 선수들은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때문에 대대로 있어왔으며 최근 잉글랜드 대표팀에 합류한 잭 그릴리시도 원래는 아일랜드 청소년 대표로 활약한 선수였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중국적자들의 국적변경은 두 나라 사이에서 비일비재했다.[7][8] 다만 아일랜드 태생의 선수 중 너무 어릴 때 영국으로 건너가는 유망주들이 많아 잉글랜드에서 오래 활동한 뒤 잉글랜드 국적을 취득해 잉글랜드 국대로 이적해버리는 상황을 제일 우려했지만, 그동안엔 아일랜드와 영국 간 역사적 문제도 있고 해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봤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 현실로 나타나버리고 아일랜드 협회는 무진장 욕을 먹었으며, 데클란 라이스도 살해협박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20년 들어서 현재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는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매 경기마다 0대0 무재배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2020-21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달랑 1득점만 기록하였는데, 그 득점도 공격수가 아닌 중앙 수비수인 셰인 더피였다. 게다가 이 네이션스 리그 유일한 득점이 2020년 A매치중 유일한 득점이다... 과거에는 로비 킨같은 믿음직한 공격수나, 네임 밸류는 떨어져도 조던 월터스나 셰인 롱 같은 선수가 종종 골을 넣어줬는데 이제는 나이도 많을 뿐더러 이만큼 해줄 수 있는 포워드가 아일랜드에 현재 없다. 빨리 포워드 쪽의 세대 교체가 시급한 시점이다.
현재 유니폼 스폰서는 뉴발란스이다.[9]
3. 현재 스쿼드
4. 역대 감독
5.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6. 역대전적
6.1. FIFA 월드컵
'''월드컵 역대 전적 순위 : 38위'''
'''⑧⑯⑯'''
총성적 '''2승 8무 3패 승점 14점'''으로 '''38위'''에 랭크되어있다. 공교롭게도 분단국가 북아일랜드와 월드컵 진출 횟수, 승점이 모두 같은데 북아일랜드가 승리는 더 많고 골득실은 아일랜드가 더 많다. 월드컵 본선처럼 골득실을 우위에 두므로 역대 순위에서는 아일랜드가 하나 더 높다. 북아일랜드가 규모는 아일랜드보다 훨씬 작지만(애초에 아일랜드에서 독립 못하고 영국에 남은 북동쪽 귀퉁이가 현재의 북아일랜드다.), 영연방에 속해서인지는 몰라도 월드컵 맛은 더 일찍 봤다. 1958, 1982, 1986년 이렇게 나왔는데 북아일랜드가 마지막으로 나온 월드컵 다음에 아일랜드가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그동안 북쪽 촌동네가 월드컵 가서 활약하는 모습 보고 배아파했던 본토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과의 상대전적은 독일 1무(2002), 이탈리아 1승 1패(1990, 1994), 스페인 1무(2002), 잉글랜드 1무(1990), 네덜란드 1무 1패(1990, 1994), 멕시코 1패(1994), 루마니아 1무(1990), 카메룬 1무(2002), 사우디아라비아 1승(2002), 노르웨이 1무(1994), 이집트 1무(1990)이다.
대륙별 상대전적은 유럽 1승 6무 2패, 북중미 1패, 아프리카 2무, 아시아 1승이다. 제3대륙과 모두 붙어봤는데 특이하게도 남미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2002년 조별리그 사우디아라비아전 3:0 승으로 세 골을 넣었고, 한경기 최다실점 기록은 1994년 조별리그 멕시코전 1:2 패, 1994년 16강 네덜란드전 0:2 패로 단 두 골에 불과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처음으로 진출했는데 대진이 만만치 않았다. 오렌지 삼총사가 버티는 유로 1988 우승국 네덜란드와 게리 리네커의 활약으로 대회 4강까지 오른 잉글랜드, 56년만에 본선에 오른 이집트와 한 조였는데, '''세 나라와 모두 무재배를 하고 심지어 같이 3무한 네덜란드와 골득실까지 같아 동전 던지기로 순위를 갈랐다'''. 동전 던지기의 승자는 아일랜드가 되어 조2위를 차지했고 네덜란드가 3위로 미끄러졌는데, 당시는 24개국이라 조3위 6개국 중 상위 네 나라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에 네덜란드도 16강에 진출은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위로 올라간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하필 네덜란드가 맞붙은 상대가 서독이었던 것. 반면 아일랜드는 루마니아와 붙어 상대적으로 쉬운 대진이었다. 조 3위로 미끄러진 네덜란드는 16강전에서 '미리보는 결승전'을 치르고 장렬하게 전사했고 아일랜드는 루마니아와 무득점 무재배 승부차기로 승리, '''한 경기도 이기지 않고 8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8강에서는 개최국 이탈리아를 만나 역시 장렬히 전사. 유럽 변방의 첫 월드컵 무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4무 1패 2득점 3실점이라는 기록으로 8강까지 갔다.
이후 1994 월드컵에도 연속 진출해 죽음의 조에 걸렸는데, 이탈리아, 멕시코, 노르웨이와 만나 '''네 나라가 1승 1무 1패를 기록, 골득실까지 같아''' 다득점으로 1위와 4위를 갈라야 했다. 일단 멕시코가 다득점에서 앞서 1위를 차지했고, 이번에도 아일랜드는 '''이탈리아와 승점, 다득점까지 같아''' 동전 던지기로 순위를 가르진 않았고 아일랜드가 이탈리아를 이긴 덕분에 승자승에서 조 2위를 가져갔다. 우승후보 팀을 연속으로 조 3위로 밀치고 2위로 16강에 올라간 것. 다만 이번엔 이탈리아가 로베르토 바조의 대활약으로 각성하면서 결승에 올라갔지만 아일랜드는 16강전에서 네덜란드를 만나 0:2로 패하고 짐을 쌌다. 8년 뒤 한일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로비 킨의 대활약으로 1승 3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다. 독일, 스페인과도 모두 무재배한 뒤에 16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짐을 싸는 등 월드컵만 나갔다 하면 기본 16강은 항상 가는 유럽의 고춧가루 팀으로 명성을 날렸다.
다만, 덴마크도 아일랜드와 한때는 똑같은 포지션이었다가 2010년, 네번째 무대에서 깨진 만큼 아일랜드 또한 앞으로 어느 대회에서고 얼마든지 깨질 가능성이 있으며, 일단 2002년을 마지막으로 본선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2010년엔 프랑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앙리에게 신의손을 얻어맞고 억울하게 떨어졌지만[15] 오히려 이후로 전력은 더 크게 하락하면서 2014년에는 플레이오프조차 가지 못한 상황. 2018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원정인 코펜하겐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였으나, 홈에서 에릭센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5:1로 대패'''해, 밀라노 참사에 버금가는 '''더블린의 비극'''을 당했다. 과연 부진을 씻고 언제 월드컵에 다시 올라올지 기대해 볼 일이다.
6.2. UEFA 유로
'''UEFA 유럽 선수권 대회 순위 : 20위'''
[1] 영어[2] 아일랜드어[3] 자치령의 지위에 있었다. 1937년에 헌법을 개정해 완전 독립을 선포한다.[4] 1937년에 독립을 선포했을 때는 영국 국왕과 아일랜드 대통령이 모두 국가원수였다. 1948년에 공화국법을 제정해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직위를 박탈했고 1949년에 영국이 이를 인정했다.[5] 다만 이때 FIFA가 선수 국적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기에 국적을 쉽게 바꿔서 뛸 수 있었고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 4명의 선수는 IFA와 FAI 대표팀으로 모두 경기에 출전했다. 두 국가가 같은 조가 아니였기에 가능했고 한 월드컵에서 두개의 국가대표로 모두 뛴 유일한 사례. 지금은 FIFA가 주관하는 경기(친선 경기 제외)에 이중국적자 선수가 국가대표팀을 골라 1초라도 출전하면 국적을 절대 바꿀 수 없다.[6] 그러나 이것은 이미 지역예선에서 FAI 대표팀로 뛰고 있던 4명이 한창 지역예선 도중에 IFA 대표팀으로 뛴 것이었고 이에 FAI가 FIFA에 항의하였다. 결국 IFA 역시 FIFA의 결정을 수용하여 1950년부터 남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중단하면서 지금의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되었다.[웨스트햄] [셰필드] A B [토트넘] [뉴캐슬] A B [번리] [팰리스] [빌라] [사우스햄튼] [에버튼] [7] 잉글랜드 주포 해리 케인만 해도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 대표팀 제의를 먼저 받았을 정도다. 또한 웨인 루니도 아일랜드계 집안에서 태어난 잉글랜드인으로 그의 동생인 존 루니는 뉴욕 레드불스 활약 시절 아일랜드 대표팀으로 뛰고 싶다는 의사도 피력한 적이 있다.[8] 반대로 에이든 맥기디는 스코틀랜드 태생이지만 아일랜드 국적을 선택해 최근까지 대표팀 주력 윙어로 활약했었다.[9] 여담으로 아일랜드 대표팀의 훈련복에 있는 ''3''이란 숫자는 누군가를 기리기 위함이 아닌, 아일랜드의 통신업체 Three Ireland의 로고이다. 우리나라의 트레이닝 스폰서 kt와 같은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이 스폰서는 2020-21 시즌부터 첼시 FC의 스폰서가 되었다.[10] 1950년 월드컵 이전에는 아일랜드 자유 주라는 이름으로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11] 조예선에서 '''3무''', 16강전에서 '''승부차기'''로 이겨 8강에 갔다. 4무의 성적으로 첫 월드컵에서 8강 진출.[12] 조예선 네 나라가 1승1무1패를 기록한 혼돈의 조였는데, 아일랜드는 이탈리아를 잡고 16강에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조3위 와일드카드로 겨우 16강 갔는데 결승에 가서 브라질과의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그런 이탈리아를 잡은것. 월드컵 11대이변에 속하는 경기.[13] 조별예선에서 독일, 카메룬, 사우디 아라비아와 E조에 편성되었고, 2승 1무를 거둔 독일에 이어, 1승 2무의 성적으로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였다. 조별 예선 2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로비 킨의 동점골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이 골은 독일이 결승전을 치루기 전까지 유일한 실점이었고 심지어 골키퍼는 그 대회에서 야신상을 수상한 올리버 칸이었다. 16강 스페인전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에게 실점하여 0:1로 끌려가다가 후반 종료 직전 페르난도 이에로의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로비 킨이 성공시켜 연장전까지 갔으나, 승부차기에서 세 명의 키커가 연속으로 실축하며 PK 스코어 3:2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 때 아일랜드를 누르고 8강에 진출한 스페인은 개최국 대한민국을 만났고 4강의 제물이 되었다.[14]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15] 그래서 프랑스가 남아공 가서 죽 쑬 때 그렇게 좋아했다 카더라.